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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mans of Kumdo 옹기장학회 사무국장 구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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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또 오해영> <나의 아저씨> <나의 해방일지> 등으로 백상예술대상에서 각본상을 받은 박해영 작가는 교육원 강의 중 어떻게 글을 쓰느냐는 학생들의 질문에

‘‘네가 그렇게 감동적이거나 재미있다고 느낀 것은 그 요소가 네 안에 있는 거고 그것을 보여주면 되는 거야. 전혀 특별한 것이 아니야라고 말한다.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뭘 하면 좋은가를 고민하는 예전 직장 후배들에게 해주는 말 중에 한 가지를 말씀드릴까요? 기억이 있는 너댓살 경부터 지금까지 자신이 칭찬받았던 것 100가지만 써보라 합니다. 예컨대 글씨를 잘 쓴다, 노래를 잘 부른다, 무엇을 잘 만든다 등등,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관계없으니 적어보라 합니다.

 

그러면 그 100가지 칭찬받은 것들 사이에서 공통분모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 공통분모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고 가장 잘하는 것이라 할 수 있으니 그것을 직업으로 삼으면 된다고 합니다.

 

그다음에 시너지 효과를 찾는 것입니다. 자신이 잘하는 것 한 가지만 파는 것보다는 두세 가지를 엮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옷감에 관심이 많고 중국어를 잘하며 무역법을 조금 안다면 중국과 무역을 시작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내가 잘하는 것들은 이미 내 안에 있고 그것을 찾아내는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방법으로 잊고 있었지만 한때 너를 빛나게 만들어 주었던 칭찬의 기억들을 소환하여 list up 하면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거라는 구재회 사범님의 설명은 그의 75년 삶의 궤적을 통해 얻은 통찰력에서 나온 것일 것이다.

 

1968년 제49회 전국체전에서 충북검도대표로 출전하여 금메달을 목에 걸고 유단자가 되었지만 대학 진학, 가정생활 그리고 40여 년의 직장생활에 올인하면서 죽도를 놓았던 17세 소년 구재회가 두 세대가 지난 70세에 장형부로 돌아와 75세에 검도 사범이 되었다.

 

평화방송 · 평화신문 재직 시 故 김수환 추기경(金壽煥, 스테파노)님이 북방선교를 위한 사제 양성 지원을 위해 설립한 옹기장학회에서 사무국장으로 업무를 보고 있는 구재회 사범님을 명동성당 아래 가톨릭회관에서 만나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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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안녕하세요, 제가 지금은 다른 일을 하고 있지만 처음 사회에 나와 시작한 직장이 이곳 명동에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이곳에 오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장학회 일로 바쁘실 텐데 이렇게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 저도 길 건너편 평화방송 · 평화신문에서 근무하다 정년퇴직을 했는데 그땐 아주 가끔 이쪽으로 건너와 식사를 했었습니다. 이곳 가톨릭회관 옹기장학회 사무실로 온 지 벌써 15년째가 되는군요. 저는 이른 아침 6시 반 조금 넘어 출근해서 오후에 조금 일찍 퇴근합니다. 이렇게 멀리까지 와 주셔서 반갑고 고맙습니다. 지금 점심시간이니 식사부터 하시고 말씀 나누기로 하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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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옹기장학회 사무국장으로 일하고 계시는데, 옹기장학회에 대해 설명을 해주실 수 있는지요?

 

옹기는 우리 선조들이 사용하던 질그릇을 말하는 것이지만 故 김수환 추기경(金壽煥, 스테파노)님의 아호이기도 합니다. 통일 이후 북한에서 선교할 사제를 양성할 목적으로 2002 1122일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직접 설립한 장학회입니다.

 

옹기는 박해로 인해 늘 도망다녀야 했던 천주교 교우들이 옹기를 직접 만들어 팔러 다니면서 천주교인의 신분을 숨길 수 있었고 신자들끼리 정보도 교환하고 선교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옹기 도마가 있는 곳은 대개 천주교 교우 집성촌이었고 김수환 추기경님도 1922년 옹기장수의 아들로 태어나셨습니다.

 

옹기장학회(이사장 정순택 대주교, 운영위원장 박신언 몬시뇰)는 향후 북한 및 아시아지역 선교사제로 사목활동을 펼칠 신학생들에게 매 학기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북방선교를 희망하는 수도자와 평신도 선교사, 그리고 선교 관련 연구자와 단체 등에도 장학금을 확대 지급할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Q. 그렇군요. 옹기가 천주교우들의 삶과 신앙을 담아내었고 천주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범님께서는 기업체 임원과 평화방송 평화신문에서 근무하셨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이 장학회 업무를 보게 되셨는지요?
 

. 저는 40여 년 동안 서너 군데 직장을 옮기면서 사회 생활에 집중하였고 마지막으로 평화방송 평화신문에서 정년퇴직을 하였습니다.

 

평화방송 · 평화신문 재직 중이었던 2002, 옹기장학회 설립 사무를 보았는데 그것이 인연이 되어 퇴직 후에도 장학회 사무를 보고 있습니다. 이제 15년이 넘었네요. 또 옹기장학회 운영위원장이신 박신언 몬시뇰이 제가 군대 있을 때 군종신부님이셨는데 그것도 인연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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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김수환 추기경님은 생전은 물론 사후에도 종교를 떠나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계십니다장학회 업무 등으로 생전에 지근(至近)거리에서 추기경님을 모셨을 텐데 추기경님은 어떤 분이셨는지요?

 

한마디로 표현하기가 · · ·  성인(聖人, Sanctus, Sancta, Saint)이시지요. 마침 천주교 서울대교구에서 김수환 추기경님을 복자 반열에 올리려는 시복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복자가 되신 후에는 일정한 기간을 지나고 특별한 기적이 발생한다든지 성인 반열에 들 수 있는 요건이 형성되면 성인 품에도 오르실 수 있습니다. 성인이 되시면 온 세계가 그분을 기억하며 공경하게 됩니다.

 

추기경님은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라는 자신의 사목 표어를 몸소 실천해 온 신앙인이셨습니다. 독일 뮌스터 대학과 대학원에서 신학과 사회학을 공부하시고 귀국 후에는 인간 존엄성에 대한 신념을 바탕으로 공동선을 추구해야 하고 공동선을 추구하는 과정에서는 어떠한 불의와도 타협을 거부해야 한다고 역설하셨습니다.

 

1970년대의 유신체제 아래서 정치적으로 탄압을 받던 인사들을 위해, 1980년대에는 민주화 운동을 위해 근·현대 사회의 큰 어른으로서의 역할을 다하셨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천주교 200주년 기념행사 및 세계성체대회를 개최함으로써 교황님을 이 땅에 모시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고 이로써 한국 천주교회의 위상이 크게 격상되는 결과를 낳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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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저도 80년대 학번이라 민주화 운동 당시 명동성당으로 밀려들어 오는 사람들을 기꺼이 보듬어 주시는 모습을 기억합니다. 검도얘기를 좀 여쭙겠습니다. 사범님께서는 올해 75세 이시고 70세 나이에 검도를 시작하여 4단이십니다. 검도는 어떤 계기로 시작하셨는지요?

 

제 검도 얘기는 조금 거슬러 올라 가야겠네요. 고등학교 다닐 때 검도를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 저 또래 학생들이 다 태권도나 유도나 한 가지씩 운동을 해서 저도 뭔가 해야지 생각하던 중 중학교 동창이 검도를 하길래 나도 검도해도 되겠냐고 하면서 자연스럽게 시작하였습니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당시 지도 사범님이셨던 6단 김유섭 선생님, 범사 8단 고규철 선생님(당시 4) 아래서 수련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고등학생이었던 1968년 봄에 초단을 따고 그해 가을 서울에서 개최된 제49회 전국체전에 충북대표로 출전하여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땄습니다. 그때 저는 선봉으로 뛰었습니다. 2단을 끝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생활, 사회생활에 올인하느라 검도를 멈추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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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그럼 70세에 처음시작한 것이 아니고 다시시작하신 거군요. 괜찮으시면 사범님의 60여 년 전의 검도 얘기나 에피소드가 있다면 몇 가지 들려주실 수 있으신지요?

 

기억이 단편적이지만 몇 가지 말해 보겠습니다. 이것은 제가 68년도에 받은 빛바랜 검도단증 사진인데 지금과는 완전히 다르지요? 그때는 초단 이상이 되면 서울에 신청하여 배지도 받았는데 이것은 굉장한 자부심이었습니다.

 

고규철선생님은 당시 4단이셨지만 우리가 범접할 수 없는 실력에 정말 하늘같이 존경했습니다. 지금처럼 사범님들하고 하는 자연스런 대련이나 시합연습은 없었고 그냥 미친 듯이 공격연습만 하다가 헉헉거리면서 나오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제가 겁이 없어 보였던지 단체전에서 늘 선봉에 넣어 주셨습니다. 하하

 

전국체전이었지만 전국규모의 대회를 치룰만한 검도 경기장이 없어 서대문형무소 검도장에서 대회를 개최하였습니다. 저희들은 금메달을 딴 후, 너무 자랑스럽고 기쁜 나머지 갑과 갑상을 입은 채 메달을 목에 걸고 버스를 이용하여 숙소로 돌아왔던 기억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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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듣고만 있었는데도 오래된 추억 사진을 보는 듯하였습니다. 18세에 놓았던 죽도를 70세에 다시 잡으셨는데 그건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요?

 

일흔 살이었던 2020년에 다시 검도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고교시절 함께 운동했던 분들과 연락이 되어 몇 번의 만남 자리를 갖게 되었고 자연스레 검도에 대한 얘기를 하다 보니 이분들은 계속 운동하여 8단 범사, 6~7단 되셨고 그 와중에 저에게 다시 검도를 해보면 어떻겠냐는 권유가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남들은 운동을 그만둘 나이에 무슨 소리냐고 하였지만 검도에 대한 매력이 가슴 속에 남아 있었고 평생검도라고 하는데 한번 해보자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마침 오정영(8)범사가 제가 살고 있는 고덕동에 훌륭한 관장이 지도하고 있는 검도장이 있으니 그곳에서 시작해 보라 하여 현재 그곳 고덕검도장에서 수련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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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도장 소개 말씀 중에 다른 무엇보다도 관원들이 주는 올해의 고덕검도인수상이 자랑스럽다고 하셨습니다. 사범님의 도장생활이 관원들로부터 좋게 평가받은 것이 아닌가요?

 

모두들 좋게 봐주셨습니다. 성인 관원들의 투표로 이루어져 더 의미가 있었습니다. 관장님으로부터 부상으로 진가검도 받았습니다. 훌륭한 지도와 인품으로 타의 모범이 되어 주시는 김치만관장님(교사8)과 박혜연관장님(7)과 가족같이 친근한 관원들, 그리고 화기애애 하면서도 질서를 벗어나지 않은 도장분위기는 당시 새롭게 시작하는 저에게 많은 안정감과 도움을 주었습니다.

 

고등학교 때 받은 공인 2단을 인정받았지만 관장님께 아무것도 모르는 초보자처럼 지도해 달라고 부탁을 드렸고 힘들어도 월수금 한번도 빠지지 않고 4년 째 수련하여 4단에 승단하였습니다. 일본팀에게 패하긴 했지만 사회인대회에 장형부로 출전하는 기회를 가지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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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나이와 과거의 경험을 내세우는 순간 관계는 굳어진다고 하는데 사범님께서는 관계를 흐르는 물처럼 순리에 맞게 풀어낸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평생검도를 위해 검도인이 중요하게 생각했으면 하는 점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조심스러운 얘기네요. 검도는 나이를 먹어서도 그리고 손자와 할아버지가 칼을 맞대고 할 수 있는 유일한 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좋은 운동이 오래도록 지속되고 남에게도 진심으로 소개할 수 있으려면 모범공부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모범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저희 도장 김치만 관장님께서는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8단이심에도 관원들과 수련 전후 수시로 혼자서 거울을 보면서 자세를 바로잡고 고칠 점은 없는지 점검하십니다. 이런 모범은 열 마디 말보다 더 강한 교육 효과가 있으며 지도자와 수련생 사이뿐만 아니라 도반 사이에서도 긍정적 효과로 작용하여 서로 성장하는 데 도움을 줄 것입니다. 또한 언제나 자상하게 관원들을 대해 주시면서 자세나 기술의 잘못된 점을 쪽집게처럼 잡아내 주십니다. 그런 관장님을 보면서 관원들은 실력이 점점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되고 검도하는 것이 즐거워질 뿐 아니라, 도장 오는 발걸음이 더욱 가벼워지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공부인데, 유단자들이 검도 기능 향상에 기울이는 노력만큼 검리에 맞는 동작과 왜 그런가 하는 의문을 항시 갖고 체계적으로 공부했으면 합니다. 이론적 바탕이 없는 검도기능 답습은 어느 순간 성장은 정지되고 자기를 믿고 따라 온 검우들에게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어 나쁜 결과를 낳습니다. 또 그 후배는 그 후배에게 · · ·   악순환 되는 거죠. 평생 수련해야 할 운동이므로 천천히 가더라도 바른 방향으로 가기 위해 이론적 무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고덕검도관은 금요일 저녁에는 오픈되어 누구나 함께 수련할 수 있습니다. 한 번 시간을 내어 교검지애를 나누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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