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도 구석구석 십여 년 만의 검도대회 관전기
페이지 정보
본문
대학 때 검도부 활동을 열심히 했지만 취업, 출산, 육아의 롤러코스터에 올라탄 후 칼을 놓은 지 어언 10년이 넘었다. 대학검도연맹전이 가까운 곳에서 열린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남편과 함께 동아리 후배들을 응원할 겸 경기장을 찾았다.
경기장에 들어서자 개회식을 위해 줄지어 선 선수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옴과 동시에 경기장 특유의 호구 냄새가 순식간에 나를 동아리 검도부 시절로 데려다 놓았다.
곧이어 후배들을 찾아 관중석으로 올라가는 길, 낯익은 얼굴들이 여기저기서 보였다. 이름은 잊었지만, 내가 검도를 떠나있던 10여 년간 만난 적도, 따로 떠올린 적도 없지만 검도장에 오면 만날 수 있었던 얼굴들이 여전히 거기 있었다.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살다가 오랜만에 돌아왔는데 변함없이 고향을 지키고 있는 친구를 만난 느낌이라고 하면 맞을까.
잠깐만 보고 오려고 했는데, 후배들의 경기가 끝난 뒤에도 경기장을 떠날 수가 없었다. 호쾌하게 공격이 들어가는 장면이 나올 때마다 내 일인 양 흥분하며 경기를 지켜보았다.
십여 년 만에 다시 찾은 경기장에는 시대의 변화에 발맞춰 변화한 경기 운영도 돋보였다. 예전에는 시간을 재는 스태프만 경과 시간을 보고 호루라기를 불거나 깃발을 들어 표시했던 시합시간이 경기장마다 세워진 모니터 화면을 통해 투명하게 표시되었다.
단체전 같은 경우 경기 결과가 각 경기장 옆에 세워진 화면에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되기도 했다. 중간부터 경기를 보기 시작했더라도 어느 팀이 앞서고 있는지 지금 들어간 주장은 두 판 이상으로 이겨야 하는지, 비기기만 하면 되는지 다른 사람이 브리핑을 해주지 않아도 금방 파악할 수 있었다.
너무 옛날 사람 같지만 ‘라떼는’ 검도 경기를 보러 가면 어떻게 해서든 프로그램북을 한 권 얻어서 볼펜으로 일일이 표시하면서 봤어야 했는데 이제는 모니터 화면을 통해 한눈에 경기결과를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다만 프로그램북이 없으면 누가 누구를 이기고 올라갔는지 대진표 전체를 알 수는 없어서 경기장 안에 들어오면 대진표와 함께 실시간으로 결과가 업데이트되는 앱이 나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토너먼트 형식으로 경기를 하는 여러 종목에서 함께 쓸 수 있는 앱을 개발해서 종목별로 필요한 사양을 커스터마이즈 해서 쓰면 좋겠다는 엉뚱한 생각으로까지 이어지다 보니 잊고 있던 다른 기억도 떠올랐다.
2000년에 신문방송학과 대학원에 다니던 시절에 미디어 영상 수업을 들으면서 벤처 사업 아이디어를 제출해야 하는 과제가 있었다. 그때 떠올린 아이디어가 나 같은 아마추어 검도 선수도 자기 경기모습을 동영상으로 찍어서 소장하고 싶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검도경기를 녹화해서 대회 이름을 클릭하면 대진표가 나오고 대진표의 경기를 클릭하면 모든 경기 영상이 올라가는 서비스가 있으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핸드폰 카메라로 동영상 녹화 버튼만 누르면 쉽게 동영상을 찍을 수 있는 지금이야 그게 무슨 사업 아이디어가 되나? 싶지만 예전에는 시합 영상을 찍으려면 동영상이 녹화되는 카메라와 삼각대, 미니 카세트테이프처럼 생긴 저장매체를 사용해야 했다. 기록한 영상을 찾아볼 때도 영상을 재생해놓고 리모컨으로 빠르게 감기를 해서 원하는 장면을 일일이 찾아야 하다 보니 방송으로 중계되는 일부 경기가 아니고서는 자신의 경기 영상을 개인이 소장하고 그걸 보면서 경기를 복기하기는 어려웠다.
그런데 이제는 휴대폰으로 동영상을 찍어두었다가 역시나 휴대폰으로 간단하게 필요한 부분만 잘라서 언제든지 돌려볼 수 있으니 10년이란 시간은 정말 강산이 바뀌는 시간이 맞구나 싶었다. 그날 찍어온 경기 영상들 중 다시 보고 싶은 멋진 순간들은 득점 순간을 중심으로 편집해서 지금도 가끔씩 돌려보곤 한다.
그로부터 몇 주 후 사회인검도대회 마지막 날에 잠깐 경기를 보러 갔더니 대형 전광판에 뭔가 표시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시력이 좋지 않아 그 전광판의 정보를 읽지는 못했지만 진행 중인 게임의 경기 결과를 보여주는 듯했다. 관중들이 필요로 하는 정보를 제공해 주려는 주최 측의 노력이 계속되고 있는 것 같아서 믿음직했다.
집 근처에서 열리는 경기를 보러 갔다가 몇 시간 사이에 과거를 여행하고 현재로 돌아온 것처럼 격세지감을 느꼈다. 집에 돌아와 생각에 잠겼다. ‘내가 왜 검도를 그만뒀더라?’ 회사 다니면서 아이들을 키우려니 시간이 없어서였다. ‘지금도 그런가?’ 생각해보니 여전히 회사를 다니지만 아이들이 내 손길을 많이 필요로 하는 시간은 지나있었다.
칼을 내려놓은 또 하나의 이유는 사무직의 고질병인 거북목과 목디스크 증상 때문에 목과 어깨가 안 좋아져서 호구를 쓰고 운동하기 부담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그런가?’ 생각해보니 최근 3년쯤 걷고, 스트레칭도 하면서 공을 들인 덕에 목과 어깨의 고질적인 통증은 없어진 상태였다. 결국 하도 오래 쉬다보니 내가 왜 쉬고 있는지도 잊고 있었던 거였다.
그렇다면 검도를 다시 시작해보는 건 어떨까? 하는 질문으로 이어졌다. 답은 Why not? 경기에 출전하는 후배들 응원하러 간 나비의 날갯짓이 불러일으킨 폭풍은 제2의 검도로 이어졌다. 제2의 검도라고 굳이 구분해 부르는 이유는 내가 20대의 몸과 생각으로 시작해서 10여 년간 해왔던 검도와 40대의 끝자락에서 다시 시작하는 검도는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기고 잘 하려고 하는 검도보다 연습 때 큰머리를 제대로 치는 기쁨을 소소하게 누리며 손목, 발목, 무릎 다치지 않고 건강하게 지속 가능한 검도를 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싶다.
10년 전의 경기운영과 지금의 경기운영 방식의 차이를 생각하니, 지금부터 10년 후에는 검도 경기는 또 어떤 모습으로 기술의 발전에 발맞추어 갈지도 궁금해진다. 10년 후의 검도 경기장으로 타임리프를 할 수는 없으니 궁금한 마음은 넣어두고 좀 더 자주 경기장을 찾아 선수들의 멋진 경기를 응원하면서 조금씩 일어날 변화들을 그때그때 감탄하며 누려야겠다고 생각해 본다. 그 변화를 위해 수고해주실 검도회 여러 실무자 분들께 미리 감사드리며 십여 년 만의 검도 경기 관전기를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