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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도 구석구석 한국 검도계의 거목(巨木) 故 봉림 이재욱 회장을 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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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14년 전쯤 되는 지난 20006월 말 이재욱 당시 본회 회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는 깜짝 놀라 전화를 받으며 인사를 드렸다.

전화 내용은 본회 전무이사를 맡아 달라는 말씀이었다. 당시 나는 매일 아침과 주말이면 검도수련에 여념이 없으면서도 본회 국제담당 상임이사직을 맡아 하고 있었고 직업은 외국 항공사 임원으로 아주 바쁘게 살고 있을 때였다.

너무 놀라서 저는 전무이사를 할 시간적 여유가 없어 죄송하다라고 거절을 했더니 전국적으로 많은 검도인에게 전화해 알아보니 모두 당신을 추천하고 있다라고 말씀하시며 검도발전을 위해 다시 한번 생각해 꼭 전무이사직을 수락해 달라고 강하게 요청하셨다.

그 당시 고 김영달 선생님이 본회 실무 부회장이셨는데 그해 돌아가셔서 이종림 전무이사가 실무 부회장을 맡게 됨에 따라 전무 자리가 공석이 되므로 나를 지명하신 것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다음날 다시 전화를 받고 마지 못해 수락하였으나, 그 당시에 본회에 꼭 필요한 두 가지를 요청하게 되었다. 첫째로 본회의 원시적 홈페이지를 최고의 홈페이지로 다시 만들어야 한다는 것과 일본처럼 검도인들을 위한 월간 검도잡지의 창간을 해야 한다는 말씀을 드리며 그 재정적인 지원을 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 당시에 홈페이지 제작에 5천만 원, 잡지사 창건에 15천만 원에 달하는 큰 재원이었으나 이재욱 회장은 그 자리에서 쾌히 수락하시고, 크게 격려해 주시어 전무이사 소임을 맡게 되었다.

그리고 2주일 인가 후에 개최된 20007월 이사회에서 정식 취임을 하면서 그 후 이 회장님의 전면적인 지원과 도움으로 수많은 일을 추진해 나가게 되었다.

 

이재욱 회장은 본회의 21대 회장이었던 김세중 씨가 개인적인 사정으로 취임 2년 만에 사임하시자 그 후임으로 199919일 본회 22대 회장으로 취임하셨고 2001123대 회장으로 연임하시며 후두암 수술 후유증 치료를 위해 회장직을 그만두시고 20051, 23대 김기순 회장이 취임할 때까지 장장 6년간 당시 세계적인 통신기기 회사인 핀란드계의 NOKIA 한국 법인 회장으로 불철주야 노력하시면서도 한편으로 검도발전을 위해 온 힘을 쏟으셨다.

 

중요한 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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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모든 검도인이 필요로 하는 본회 홈페이지를 2000년 당시 최고 수준으로 제작하기 위해 전면적인 지원을 해 주셔서 공개 입찰한 업체와 함께 수많은 관련 검도인들이 총동원되어 6개월간 검도 콘텐츠를 만들고 오픈함으로써 전일본검도연맹(AJKF)이 벤치마킹하겠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당시 가장 뛰어난 본회 홈페이지를 만듦으로써 작년 2023년에 신임 집행부가 새로 5천만 원으로 홈페이지를 제작하기 전까지 22년간 계속 사용할 수 있게 하였다. 당시 획기적으로 본회와 검도인들 간에 소통과 서비스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중요하고 큰 고속도로가 마련된 셈이었다.

두 번째로 월간 검도잡지 창간이었다.

입찰을 통해 잡지사를 선정하고 잡지를 창간하여 독립채산제로 운영하게 하였다. 검도인들의 커뮤니케이션 장()을 만들어 많은 투고를 자유롭게 할 수 있게 하는 한편 매월 본회의 검도 행사와 정책을 자세히 알리고 검도 이론에 관한 좋은 내용도 번역하여 게재할 수 있게 일본의 검도시대와 제휴를 하기도 하였다. 인쇄 매체의 잡지로 당시에 인기가 많았으나 잡지사의 경영상의 미숙으로 적자가 누적되어 2년 만에 발행이 중지된 것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었다. 그러나 그로 인하여 계간()이나마 잡지형태의 본회 회보가 나오게 되었고, 지금은 홈페이지 안에 비용이 거의 들지 않는 웹매거진 검도톡톡 (Kumdo Talk Talk)”이 발행되는 계기가 되어 큰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세 번째로 본회 CI(Corporate Identity: 단체 이미지)를 만들기로 하고 당시 최고의 디자인 회사를 입찰로 선정하여 지금의 본회 로고(Logo)를 제작함으로써 지금 대회 현수막, 홈페이지, 공문서, 검도장 간판, 명함, 기념품 등 여러 부문에서 광범위하게 사용할 수 있게 하였다.

제작 시 많은 반대가 있어 예산확보도 못 하게 차단하는 극단적인 조치도 받았으나 이 회장님은 과감하게 추진하도록 별도예산으로 밀어주셔서 가능케 했다. 그 후 지금까지 모든 검도인이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다.

네 번째 역대 집행부의 숙원사업이었던 연수원과 봉림대의 기공 및 완공에 이르기까지 전력을 다하셨고, 재정적으로 많은 지원을 하셨다.

이는 획기적인 사업으로써 우리가 세계제일의 검도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는 근간을 마련하여 줌으로 지금도 매년 수천 명의 지도자가 심신을 단련할 수 있게 되었고 세계를 향한 우리의 꿈을 키우는 요람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내년 아시아검도연맹이 계획대로 창설되면 연수원은 아시아검도 발전의 산실로 탈바꿈하게 될 것이다.

다섯 번째 재미 검도인들의 단합과 기능 향상을 위해 매년 1만 불 이상 개인적으로 희사하셔서 재미 봉림기검도대회를 개최하게 하였고 국내에서도 봉림기 실업검도대회를 개최하게 하였다. 각종 비리와 불만과 반목으로 얼룩져 있던 재미검도회가 평화를 찾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다시 반목하는 분위기 속에 재미검도회가 분열되어 있어 마음이 아프다.

여섯 번째로 검도.장비와 도복의 개량을 위해 오토바이 헬멧 제작으로 세계제일인 주식회사 홍진과 협의하여 튼튼하고 값싸고 가볍고 컬러풀한 호면을 제작, 초등학생들이 전부 사용할 수 있게 하는 한편 도복 개량을 통해 검도복 디자인 및 품평회를 개최하고 섬유연구소와 제휴하여 일제 도복보다 값싸고 가볍고 자연염료를 쓰되 물 안 빠지고 방습, 방균 효과를 낼 수 있는 도복개발을 의뢰하여 검도인들의 비상한 관심을 끌기도 하였다.

일곱 번째 검도발전을 위해 아시아검도연맹의 필요성에 공감하시고 다방면으로의 조언과 지원을 고려하셨다.

 

이러한 사업들은 다음 회장인 김기순 회장에게까지 연결되어 추진되었으나 고 이재욱 회장이 그만두시고 김기순 회장의 연임이 NOKIA의 한국지사 철수 등으로 좌절됨으로써 획기적인 도복, 장비 현대화 문제와 아시아검도연맹 추진은 조용히 흔적을 감추게 되어 가슴 아팠다.

요즈음 다시 추진되는 아시아검도연맹 문제는 고 이재욱 회장 때 일본과 활발히 논의되다가 중지된 지 거의 20년이 지난 지금 다시 추진되고 있다.

 

뛰어난 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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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이재욱 회장의 리더십은 정말 탁월하셨다.

비즈니스 면에서의 능력은 당시 한국 NOKIA를 조악한 현실 속에서도 이를 극복하고 세계 최고의 지사로 끌어 올림으로서 NOKIA 회사뿐만 아니라 핀란드의 국격을 선양하였고 한국과 핀란드의 민간외교에도 큰 몫을 담당하셨기에 그 공적으로 핀란드 최고훈장을 받으신 것만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검도회장으로서도 내가 본 어느 분들보다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셨다.

언제나 온화함으로 상대를 감싸면서 상대의 의견을 해면처럼 흡수하여 수용하고 문제점과 예측 불가능한 사태까지 파악하며 조언하는 능력은 상대에게 늘 존경심을 갖게 하셨다.

상대의 인격을 존중하며 일단 세운 목표가 성공할 때까지 조용히 그리고 힘있게 추진하여 이루어 내는 그리고 늘 상대를 감동하게 만드는 비상한 재능을 갖춘 분이셨다.

당시 15천만 원이라는 거금을 들여 창립한 잡지사가 2년 만에 문 닫게 되었을 때도 이종림 당시 부회장의 요청으로 연변대학과 동양 3국 무도 관계사 편집을 위해 수억 원이 검도발전과 별 의미 없이 사용되어 김기순 회장 때에 본회에서 큰 문제가 커졌을 때도 일체의 질책 없이 조용히 뒷수습을 잘하라고 당부하시던 대단한 분!

거대한 나무와 같은 분으로 이분 밑에서 일하는 게 자랑스러움과 즐거움, 그리고 보람과 만족을 느끼게 하는 세상에 보기 드문 큰 지도자이셨다.

 

맺는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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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림(鳳林)이란 이재욱 회장의 호()로서 봉황이 깃드는 숲이니 하는 일마다 상서롭게 결실을 맺어간다.”라고 해석할 수 있는데 이분은 정말로 그렇게 모든 사람을 포용하고 도와주고 잘 성장하게 이끌어 주되 그 성과에 대하여는 자기공로를 내세우지 않고 아랫사람들에게 공을 돌리며 잔잔한 미소만 흘리시는 분이다. 신임 집행부가 찾아가 인사를 올리고 명예회장으로 모셨을 때도 그러셨다. 2년 전 수억 원에 상당하는 연수원 내 무학재 앞 옥수수밭 1,200평을 선뜻 본회에 기부하실 때에도, 그리고 본회에서 봉림대 앞에 이 회장을 기리는 동상을 세웠을 때도, 아주 좋아 하셨다고 들었는데 그때에도 아마 잔잔한 미소만을 띄웠을 것이다.

 

이제 떠나가심에 안타까움과 큰 그리움을 마음 깊이 접으며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안식을 취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