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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도 구석구석 故 송산 양춘성(範士, 8段) 선생의 삶과 검도 발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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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佛家)에서 이런 말이 있다.

온 곳을 모르니 갈 곳을 어찌 알리오. 옴이 옴이 아니오. 감이 감이 아니라.”

 

松山 梁春成 선생은 1930712(음력) 경남 거창에서 태어났다. 이후 부모님을 따라 일본 아오모리현에서 중등 과정을 다녔다. 그러던 중 조국의 광복과 더불어 귀국하였다. 검도 입문은 일본에서 중등 과정을 다니면서 시작되었다. 선생은 19501020일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비극 속에서 경찰에 투신하여 대전경찰서에서 경찰관으로 첫 근무를 시작하였고, 1951년에는 지리산 빨치산 토벌 작전에 참여하여 큰 공을 세웠다. 선생은 1954년 전국 경찰 무도대회와 전국체육대회에 선수로 참가하여 두각을 나타냈으며, 이후 경찰공무원을 그만두고 검도 지도자로서 길을 걸었다. 또한 세계검도선수권대회 국제심판(브라질, 프랑스, 서울, 캐나다, 프랑스, 일본)으로 여러 차례 참가하면서 심판으로서 대한민국을 대표하기도 하였다. 19898단 승단하셨고 1996년 범사칭호 수여 받으셨으며 1997년 대전광역시 검도회장을 역임하였다. 유족으로는 김옥연 여사와 자녀 2(양우석, 양용석) 2(양미경, 양미숙)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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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수사관에서 검도 지도자의 길로 나아가다.

1957년에 조치원 경찰서 수사과 근무와 동시에 경찰서 검도 사범으로 발령받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소속 경찰관들에게 검도를 보급하였다. 그가 검도 지도자로서 지향했던 것은 수련을 통한 검도 기술 향상과 삶 속에서의 검도 철학의 정립이었다. 그는 늘 검도란 검의 이치를 깨달아 사람이 걸어가야 할 길을 걷는 것이다.”라고 정의했다.

1961527일 선생은 그의 삶에서 중요한 기로를 맞이하게 된다. 그것은 경찰관 신분을 버리고, 험난한 검도 지도자의 길을 선택한 것이었다. 그가 검도 지도자의 길을 가고자 했던 이유는 물질적 풍요보다는 검도 지도자로서 지역사회에 봉사하고자 하는 열망이 더 컸기 때문이다. 선생은 경찰공무원을 사직한 이후, 검도의 보급을 위해 개인재산을 털어 중고등학교에 검도 장비를 기증하고 학교 검도부창단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고등학교, 대학교에 검도부를 창단하다.

선생은 지역사회로의 검도 보급과 인재 양성을 위해 조치원중학교(1969), 조치원고등학교(1968), 충남대학교(1976), 대전대학교(1981)에 각각 검도부를 창단하였으며, 무보수로 검도 선수를 양성하였다. 그리고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의 수업료를 대납해 주어 학업에 집중하게 하였으며, 끼니를 거르는 학생들을 부인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허기진 배를 채우게 하였다. 전국체전 강화훈련 당시에는 매일 고깃국을 선수들에게 제공하여 체력 향상에 도움을 주었다. 부창부수(夫唱婦隨)라고 했던가. 선생과 그의 부인의 열정과 헌신이 있었기에 조치원중고등학교가 대한민국 검도의 메카로 자리 잡게 되었다.


줄탁동시(啐啄同時): 스승의 헌신에 제자들은 승리로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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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치원고등학교(현 세종고등학교) 검도부는 1968년 창단하였고, 이듬해 1969년 조치원중학교 검도부가 창단되었다, 1970년 제12회 전국 중고연맹 검도 대회 중등부 준우승을 시작으로 1971년 제13회 전국 중고연맹 검도 대회 우승, 1972년 제1회 소년체육대회 우승을 시작으로 5회 때까지 연이어 5연패의 위업을 달성하였다. 고등부는 1975년 제56회 전국체육대회에서 첫 우승을 시작으로 58, 59, 60회 전국체육대회 연이은 우승으로 3연패를 달성하였으며 각종 대회에서도 큰 성과를 거두었다. 1976년 충남대학교 검도부가 창단되었고 1978년도 59회 전국체육대회에서 조치원고 우승, 충남대학교 우승으로 충남검도가 첫 종합우승을 차지하는 영광을 안았으며, 1979년 제60회 전국체육대회에서도 조치원고 우승, 충남대학교 준우승, 일반부 3위 성적으로 종합우승 2연패를 달성하여 충남검도의 위상을 더욱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검도의 다변화를 위하여 조치원신봉초 검도부와 조치원여고 검도부를 창단하여 조치원을 검도 명문 도시로 만들었다. 이후 대전시로 거처를 옮긴 선생은 성심검도관을 개관하여 일반인에게 검도를 보급하였고, 대전대학교, 충남고등학교, 유성고등학교 검도부를 지도하시는 등 대전, 세종, 충남검도의 산파 역할을 하면서 검도계에 크나큰 공적을 쌓으셨다.

1979년에는 한일 교도관 친선 무도대회가 발족하였다. 선생은 검도 지도력을 인정받아 그해 법무부 장관의 임명으로 청주교도소 교무 계장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또한 충청남북도 교도소 검도 지도사범으로 발령받고 청주대전공주 교도소 교정직 공무원들에게 검도를 지도하였다. 이는 대전과 청주, 공주의 검도 발전에 크나큰 발자국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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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의 제자 중 국가대표 출신을 보면 한국중고등학교 검도연맹 회장 김지천(8, 범사)을 비롯해 박종근, 김성일, 신경식, 고 임창수 사범을 들 수 있다. 대한검도회와 각 시도검도회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대표적인 선생의 후학에는 현 대한검도회 생활 체육위원회 위원장 이규호(8, 범사), 세종특별자치시검도회를 이끄는 권대혁 회장(7), 세종특별자치시검도회 부회장 이경섭(8, 교사), 경기도검도회 실무 부회장 김문배(7, 교사)가 있다. 또한 이종철, 박재규, 최재중(중등교사 퇴직) 등이 학창 시절 우수선수로 활약한 바 있으며, 대전시검도회 오정록 (대전경찰청), 대전시검도회 실무 부회장 이춘형(8단 교사), 중고연맹 전무이사 조경수(8단 교사), 대전시검도회 전무이사 박영웅(7단 교사) 등이 현직에서 활동하고 있다.

 

현재 세종특별자치시의 학교 검도부 지도자의 구성을 보면 선생을 그림자처럼 모셔 왔던 이민배(8, 교사) 사범이 세종고(구 조치원고) 감독을 맡고 있고, 선생이 사랑한 제자인 권대혁(세종자치시 검도회장)의 제자 박성호(7, 교사) 사범이 조치원신봉초등학교 감독, 이진홍(6, 연사) 사범이 조치원중 감독을 수행하고 있다. 이들은 선생의 문무겸전(文武兼全) 교육철학을 그들의 제자들에게 심어주고 있다. 이를 통해 검도부원들은 학생으로서의 학습권을 보장받으며 검도 수련을 병행하고 있다.

 

조치원고 동문 중에는 실업 선수로 활약하다가 공무원이 된 특별한 예도 있다. 수원시청(감독 김문배)에 입단해 선수 생활을 하던 박민수(2016년 경찰청장기 검도대회)와 한상훈(2017년 경찰청장기 검도대회)은 경찰청장기 검도 대회에서 개인전 우승하면서 무도 경찰로 특채되었다.

또한 다수의 동문이 엘리트 선수, 지도자를 비롯하여 생활 체육 분야에서도 두드러진 활약을 하면서 선생의 또 다른 큰 그림자가 되어 선생의 정신을 검도 분야에 구현하고 있다.

선생은 지역사회와 검도의 발전에 헌신적인 공로가 인정되어 문교부 장관 표창 1, 체육부 장관 표창 2, 법무부 장관 표창 1, 충남도지사 표창 2, 교육감 감사패 3, 대한검도회 회장 감사패 및 공로패 등을 다수 수상하였다. 2002년에는 체육 부문 연기군민 대상을 수상하였다. 선생의 삶을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아마도 그것은 검도 사랑이 아닐까 생각한다. 선생은 검의 정신으로 삶을 살았고, 검의 정신으로 세상과 소통했으며, 검의 정신을 제자들에게 심어주며 삶을 마감하였다.’ 그의 삶에 녹아들었던 검의 정신은 그의 제자들에게 또 제자의 제자들에게 자양분이 되어 영원히 죽지 않고 살아 숨 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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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검도에 대한 열정과 공적을 기리기 위해 해마다 세종특별자치시에서는 송산 검도 대회가 개최되고 있다. 올해 제20회 대회까지는 선생의 우렁찬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대회 축사 도중 마이크를 가져다주는 제자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다. “마이크 NO!” 아마도 이 말씀은 검도를 사랑하는 후학들과 중간이 없이 직접 소통하고 싶어서일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내년 대회부터는 선생의 목소리, 환하게 웃는 얼굴을 볼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그의 검도 사랑과 열정은 시합장에서 우리가 내지르는 기합의 울림 속에서 영원히 함께하리라.